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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05 16:44
역사에 대한 주체성(主體性) 2
 글쓴이 : 방공유도무기과
조회 : 1,137  

1.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역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로서 이 두 권의 책은 우리나라 역사의 근간을 이루어왔다고 가르쳐왔던 것인데 이와 같은 2권의 역사서는 어떠한 정신으로 역사를 기술하였는지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김부식은 그의 저서에서 묘청이 우리나라의 왕도 중국인처럼 황제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던 데에 말하기를 우리나라와 같은 소국(小國)으로서 대국인 중국의 왕과 같이 똑같이 칭함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면서 묘청을 신랄하게 반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법흥왕이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도 대국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연호를 사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그것은 역사 이래로 가장 큰 오류를 범했던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맞받아 싸웠던 일도 불의를 범했던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의 국력이 왜소하였던 까닭으로 비록 강대국에 빌붙어 나라를 건수할 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으로서 감히 그와 같은 망발을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김부식이 사대주의자인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처럼 쓸개마저 내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존심이 있게 마련이어서 자기 자신이 아무리 못났을지라도 못났음을 나타내기 싫어하게 마련이고 또한 그와 같은 말을 듣기조차 좋아하지 않게 마련일 것인데, 김부식은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고 이와 같은 말을 그의 저서에서 버젓이 기록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정신의 소유자가 쓴 책은 더 보아서 무엇하겠습니까?(그는 우리의 역사인 단군조선과 대진국(발해)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론한 사실조차 없습니다)


또한 일연은 그의 저서에서 말하기를 낙랑이 고구려에 의하여 멸망한 뒤에 낙랑인과 대방인의 유민이 신라에 와서 항복을 해왔기 때문에,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낙랑인이라고 자처하기를 즐겨했다고 하였습니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고구려, 백제를 정벌하였을 때만 하더라도 중국인의 잔존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우리의 선영들은 중국인과 목숨을 건 혈투를 감행했었던 것인데, 낙랑의 피난민들이 좀 망명하여 왔기로소니 그들을 흠모하여 낙랑인임을 자처하려고 했다면 왜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한 통속인 그들을 이 땅에서 쫓아낼려고 하였겠습니까?

지금도 만주에 있는 우리의 민족은 그처럼 흠모하였던 중국인의 영역속에서도 그들과 동화되지 않은 채 자치지구를 이룩하면서 꿋꿋이 민족의 정기를 보존해오고 있는 것인데, 일연의 표현대로라면 만주의 우리 동포들은 진작부터 중국인이 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일연은 김부식이 조차 그의 저서에서 일체 인정하지 않았던 대방군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남대방군은 지금의 남원으로서 마한 남쪽의 빈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영토를 남대방군에 소속시킴으로서 왜와 한()이 모두 여기에 속했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김부식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당에 볼모로 있던 백제의 왕자인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으나 당의 장수인 유인원이 당나라로 쫓겨갈 때 도 함께 따라갔으며, 당은 다시 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으로 임명하여 백제 땅으로 되돌려 보낼려고 하였지만 신라가 이미 강성하여진 까닭으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고구려 땅에서 기숙하다가 죽었다고 하였으며, 이에 당은 의 손자인 을 대방군왕으로 물려받도록 하였지만 백제 땅에 한발자욱도 들여놓지를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중국을 하느님처럼 떠 받들은 김부식의 기록이고 보면 대방군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이러한 대방군이 한()은 물론 왜까지 통치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일연의 기록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니라 일연은 걸핏만 하면 위지에 의하면하거나 한서에 의하면하면서 중국인의 사서를 인용하기에 만 급급하였을 뿐, 우리의 사서인 고기‘, ‘조대기‘, ‘삼성기‘, ‘고조선비기또는 지공기와 같은 우리의 역사서를 찾아 인용할 생각조차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조의 7대 임금인 세조께서 이와 같은 우리의 사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실록에서조차 보이거늘 일연이 살고 있던 그 당시에 그러한 사서가 전혀 없었을리 만무한데도 그는 찾아보기는커녕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기에만 바빴을 뿐이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조선국은 47분의 임금님께서 통치하신 어엿한 나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웅족(熊族) 호족(虎族)에서 자를 빼어버리고는 단군신화로 채색시켜 단군임금 혼자서 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는 기자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아사달에서 숨어 지내다가 산신이 되었다고 까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신에서 쓰여진 역사서가 어찌 우리 한민족의 정수를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오.

몽고인들이 우리의 국토를 초토화시켰을 때만 하더라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자존을 위하여 항쟁하였던 사실이 있었으며, 일제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치던 기개가 우리에게는 있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정신으로 역사가 쓰여지지 못하고 오로지 우리의 것을 깎아 내리기만 하였던 김부식과 일연의 두 역사서가 어찌 우리의 정통 역사일 수가 있겠습니까?

민족의 정수를 그린 우리의 정통 사서는 무수한 전쟁의 와중에서 불탔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얼마남지 않은 사서들은, 왜정 때 일본인들이 전 국토를 이 잡듯이 뒤져 찾아낸 역사서 중에서 그들의 통치 수단으로 합당한 몇 권을 남겨 놓고는 모조리 불태워 없애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때 불태워진 사서가 51종으로서 총 20여만 권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참상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 놓고는 한국인의 역사는 이 두 권에 다 실려 있다고 우리를 가르쳐 왔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해방을 맞은 우리들은, 시시비비를 가려볼 생각 한번 못한 채 지금도 마냥 그 역사를 학교에서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의 자존심을 제대로 회복시켜야 한다면서 동분서주한 종교단체와 뜻 있는 분들에 의하여 민족의 자존심은 여전히 남아왔으며 마침내는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몽땅 쑤셔박아 놓았던 한사군이 한반도안에서는 단 한번도 존재한 사실이 없었음이 입증되고, 또한 한민족의 정통역사는 발해까지 포함을 시켜야한다는 빗발치는 주장이 대두되게 됨에 따라서 이 강토의 왜곡된 역사를 주름잡고 있는 사학자들은 급기야 역사 교과서를 수정하는 추태를 연출하기도 하였던 것인데,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역사중 실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그동안 대국이라고 뽐내면서 스스로를 높이고 남의 것은 깎아 내리기만 하였던 중화독(中華毒), 주체성을 잃은 채 남의 것은 높이고 자기의 것은 깎아 내리기에만 바빴던 일부의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한 아부독(阿附毒), 민족의 말살에만 혈안이 되었던 왜독(倭毒)에 의하여 상처투성이로 전락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명맥만 남아있던 우리의 역사는 해방 이후 물밀듯 밀고 들어온 양독(洋毒)으로 말미암아 또 한차례의 수난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양독은 자기를 낳게 해 준 증조부와 고조부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남의 나라의 조상인 아브라함야곱의 이름은 줄줄 외우는 세태로 전락시키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를 알고 우리를 알은 뒤에 남의 것을 알아야 만 그것이 바른 순서가 아니겠습니까?


2. 단군시대 

단군은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단군이라 함은 정치와 종교가 2분화되지 않고 1원화 하였던 시대에 제사장또는 통치자라는 뜻으로서 지금으로 치면 이나 대통령과 같은 뜻을 지닌 보통명사에 해당하는 낱말입니다.

이러한 단군은 총 47분으로서 이 47분이 통치하던 시대를 우리는 단군시대라고 하는 것이며, 이러한 단군시대에 사용한 나라의 이름이 바로 조선(朝鮮)입니다.


이러한 조선은, 이성계가 고려를 이어받은 후 나라 이름을 또 조선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단군시대의 조선을 단군조선이라 하고 이성계의 조선을 그냥 조선‘ (이씨조선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비하시키기 위하여 지어낸 이름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단군 조선국의 첫 번 째 임금님은 왕검성조이십니다.

왕검성조는 환웅시대의 마지막 임금님인 거불단환웅께서 비서갑 하백(河伯)의 딸인 ()왕녀와 결혼하여 BC 2,37052일 인()시에 태어나셨습니다. ‘왕검의 나이 14세 때인 BC 2,357년에는 씨 왕이 왕검의 신성함을 듣고는 왕검을 비왕 즉 부왕으로 삼아 대읍의 국사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웅씨왕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돌아가시자 장인의 뒤를 이어 대읍국이라는 국호로 나라를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왕검께서 38세 되시던 해에는 거불단환웅께서 돌아가시자 그 종통을 이어, 아사달에서 초대 단군으로 즉위하시었으며 이 때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BC 2,333년의 일로서 이때부터 단기라고 하는 연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므로 BC 2,333년은 바로 단기 1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왕검성조의 재위 50년인 BC 2,284년에는 대대적인 홍수가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홍수는 전 지구상에 걸친 세계적인 홍수로서 이스라엘에서는 노아가 이 홍수를 겪었고 중국에서는 임금이 만났다고 합니다. ‘왕검성조께서는 이 홍수를 5행 치수법으로 잘 다스리셨으며 이듬해에는 3신을 수호하는 3랑을 위하여 지금의 강화도에 3랑성을 설치하시고 마니산에는 제천단을 쌓은 후 이곳에서 직접 3신 상제님께 천제를 지내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강화도의 마니산은 명소(名所)가 되어 역대의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이 등극한 왕은 이곳에서 천제를 지내게 된 유래를 갖게 된 것입니다.


강화도의 마니산이 이와 같이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전국체전과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곳에서 채화하여 성화를 봉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왕검성조께서는 조선의 영토가 너무 방대하였으므로 조선의 영토를 진한‘, ‘번한‘, ‘마한3한으로 나누어 진한은 직접 다스리시고 번한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다스리게도 하였습니다.

3번째 단군은 가륵성조이십니다.